트랜디한 상하이의 시작, 신천지(新天地)

2024. 5. 5. 22:24Travel/Shanghai(上海)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도시별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뉴욕하면 자본주의의 상징이며 바쁘게 움직이는 도시의 이미지

파리하면 느릿느릿하며 오후의 햇살아래 커피는 마시는 사람들

베이징하면 천안문광장이 떠오른다.

그럼 상하이는?

특이하게 트랜디하고 세련된 도시의 이미지가 있다.

왜 그랬을까?? 물론 1920년대부터 화련하게 발전된 도시였던 맞다.

하지만 그건 그때 이야기고 신중국성립 후 상하이 또한 다른 중국의 도시들과 같은 운명이었다.

이런 상하이가 개방개혁을 맞아 푸동이라는 신도시를 만들었다.

하지만 세련된 도시라는 이미지는 아직 가지지 못했다.

그런 상하이에 트랜디하고 세련된 도시라는 이미지를 가져다 주기 시작한 것이 등장했다.

바로 신천지(新天地)이다. 이름 그대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1999년 홍콩의 부동산 개발 그룹인 루이안(瑞安) 그룹이 착공했다.

위치는 프랑스 조계지였던 타이창루(太仓路)와 싱예루(兴业路)일대의 스쿠먼 양식의 거리에서 오래된 집들을 허물고 여기에 스쿠먼 양식과 유사한 건물을 짓고 화려한 쇼핑몰과 세계 각지의 유명한 레스토랑을 유치했다.

 

그런데 왜 신천지일까?

현재의 중국을 신(新)중국이라고 한다. 과거의 중국이 아니라 새로운 중국이란 뜻이고 1949년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를 한 후에 이제부터 신중국이라고 선포를 한게 시작이다.

그 신중국을 선포한 중국 공산당의 시작이 바로 여기 신천지일대이다.

무슨 소린가 하면 1923년 당시 프랑스의 조계지였던 상하이 싱예루의 한 창고에서 13명의 청년이 모여서 결성한게 현재의 중국 공산당이다.(현재 중국 공산당의 정식 당원은 9천만명이 넘는다.)

물론 창당대회를 진행하다가 프랑스군대의 습격을 받고는 저장성 지아싱(嘉兴)으로 도망가서 창당대회를 마무리 했다.

바로 저 창당대회를 했던 건물이 현재의 신천지 한가운데에 있다.

 

당연히 지금은 일대회지( 一大會址)라는 이름으로 중요유적지로 지정이 되어 있다.

(一大會址 : 첫번째 대회가 열렸던 자리)

 

이 일대회지의 이름에서 신천지라는 이름이 나왔다.(약간의 중국 정부에 대한 아부성 작명같기도 하다.)

당시에는 이런 부동산 개발사업은 중국에 없던 일이고 아무래도 사회주의 체제의 중국사회에서는 거부감이 들던 사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3년의 공사끝에 2001년에 개장한 신천지는 말그대로 초대박 히트를 치게된다.

중국인데도 불구하고 느낌은 유럽이나 미국같은 그 느낌에 상하이의 청춘들은 열광했다.

2001년이면 10년정도의 경제 개방의 효과가 나와서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에 목마르기 시작할 시기이고 어느 사회나 젊은이들은 더더욱 목마르다.

신천지 입구에 가면 첫번째로 보는 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이라고 할수 있는 스타벅스이다.

 

이 스타벅스와 위에서 이야기한 일대회지 사이의 거리는 100m도 안된다.

 

신천지는 1년내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지금이야 이런 곳들이 많아져서 훨씬 덜하다)

그리고 신천지에 들어온 각종 상점, 쇼핑몰, 레스토랑은 외국의 문물에 목말랐던 사람들로 꽉 차게된다.

동시에 상하이는 트랜디하고 세련된 도시라는 이미지를 얻기 시작한다.

맨 아래의 맥주집은 자체 브루어리인 拳击猫(Boxing Cat Brewery)이다.

단순히 이렇게 화려하고 세련된 장소만으로는 꾸준한 인기를 얻기 힘들다.

신천지 개발이 성공적이었다고 하는것은 외지에서 오는 관광객들에게도 중국과 상하이의 전통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켰기때문이다.

애초에 이 일대에 이루어져 있던 주택은 스쿠먼(石库门) 양식이라고 해서 상하이를 비롯한 이 지역의 전통건축 양식이었다. 1930년대에 상하이의 주류 건축양식이었는데 벽돌을 이용한 건물과 건물과 건물사이의 좁은 골목이 특징이다.

 

신천지 개발과정에서 이러한 스쿠먼 양식을 최대한 유지를 했다.

기존의 건물들을 잘 살리기도 했고 새로 짓는 건물도 스쿠먼 양식으로 지었다.(물론 돈이 많이 되는 쇼핑몰은 제외)

아래가 신천지의 스쿠먼 양식의 건물들이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에게 이 신천지는 조금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신천지 자체보다는 신천지 바로 앞에 있는 바로 이곳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근본이 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 청사 유적지이다.

저 건물 명판 앞에서 건물을 보는 사람의 99.999%는 한국인이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2층은 가정집이다.

실제 기념관은 왼쪽의 골목같은 곳으로 들어가야 입구가 있다.

그리고 이 건물은 현재 한국정부의 소유가 아니라 중국민간인 소유로 항상 재개발 사업의 유혹에 시달리는 곳이다.

(바로 길건너 신천지의 땅값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기는 한다.)

 

내가 상하이에 처음간건 어느 뜨겁던 8월이었고 임시정부 청사를 처음본건 광복절 부근이었다.

그때 들던 첫번째 생각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은 정말 고생하셨을것이라는 것이었다.

에어컨이나 선풍기도 없던 그 시절에 이 뜨거운 8월의 상하이를 어떻게 견디셨을지가 몸으로 느껴졌다.

 

아무튼 한국인 관광객들은 신천지와 임시정부청사는 항상 세트로 방문을 한다.

 

여담으로 당시에도 이 땅의 땅값을 매우 비싼지역이었다.

그런데 돈도 없는 임시정부가 왜 여기에 청사를 마련했을까?

그건 바로 프랑스 조계지라는 특성때문이다. 일본은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은 항상 탄압하고 암살하려고 했다. 더군다나 상하이에는 일본 조계도 있어서 일본군이 주둔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하이에 독립운동을 하려면 어떻게 해서든 보호를 받을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해주던 중국정부(당시 장제스 국민당정부)는 일본군에 맞설 힘이 부족했다.

그리고 영국은 일본과 제일 친한 짝꿍이었다.(영일동맹)

 

그래서 선택한게 프랑스조계지이다.

당시 프랑스는 프랑스혁명의 기운이 남아 있어서 저런 독립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나쁘지 않았다.

물론 투쟁 대상이 자기들이 아니라 남일 경우에 한정이다.(당시에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메카는 파리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프랑스는 영국하고 친한 일본이 꼴보기 싫었다.

그래서 상하이 임시정부에 대해서 공격을 하려는 일본으로부터 많은 보호를 해주었다.(물론 합법적으로)

예를 들면 일본정부가 프랑스 정부에 대고 임시정부가 자기네한테 테러를 했다고 항의를 하면서 가서 조사를 하자고 하면 알았다고 하고는 언제갈지를 미리 알려주는 방식등으로 보호를 해주었다고 한다.

아래는 마침 이것과 관련된 자료가 있어 링크를 건다.

https://www.nmkpg.go.kr/webzine/story/cn.do?rid=211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상하이 프랑스조계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1920~30년대의 하비로는 프랑스조계의 중심이면서 상하이의 유행과 패션을 선도하는 명소였다. … 그러나 이곳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던 임시정부는 수립 이후 얼마되지 않아 재정궁핍과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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