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드 속으로 #2 - 사행창고(四行倉庫)

2024. 7. 9. 00:28Travel/Shanghai(上海)

코로나 시기에 전세계 박스 오피스1위를 기록한 중국영화가 있다.

바로 영화 800(八百)이다.

그럼 엄청나게 명작이냐? 그건 아니다. 전형적인 국뽕영화이다.

단지 그 시절에 전세계 영화관들이 모두 운영을 안하고 있는데 오로지 중국 영화관들만 정상 영업을 했던 덕분이다.

그럼 완전히 그저 그런 영화인가? 또 그정도는 아니다. 나름 의미도 있고 어느 정도 고증도 꽤 한편에 속한다.

우선 이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 사실 실화대로만 만들었으면 엄청난 감동까지 먹었을거다.

하지만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은 중국의 국뽕영화라고는 하지만 여기서 나오는 주인공은 중국의 국민당 당군(黨軍)이다.

즉, 장제스(장개석) 친위부대인 88사단의 영웅담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기는 1937년 10월, 2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했다. 그냥 쉽게 말해서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략했다.

일본군은 해군과 공군을 이용해서 상하이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중국군을 몰아냈다.

그런데 당시 상하이에는 서양 각국의 조계지가 있다.

이때는 일본이 아직 정신줄을 완전히 놓지 않은 상태라서 진주만 공습같이 미친짓을 하지는 않을 단계이다.(정신병 초기 증세)

그래서 퇴각하는 중국군은 이 조계지를 끼고 퇴각을 했다. 덕분에 일본군은 해군과 공군을 동원한 공격이 제한된다.

잘못해서 오폭을 하면 뒷감당이 안되어서이다.

그래도 중국군은 퇴각하는 단계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원래 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오는 단계는 퇴각단계이다)

중국군은 장제스의 친위사단이자 중국군에서 가장 정예화된 88사단에게 이 후퇴작전을 엄호하는 역할을 부여했다.

거창하지만 그냥 뒤에 남아서 몸빵하다가 죽으라는 이야기다. 그래도 군인은 해야 한다.

당시 88사단 524연대는 영-미 조계지 바로 옆에 있는 사행창고를 최후의 저지선으로 잡고 여기를 교두보로 삼았다. 그리고 후퇴해오는 패잔병들을 모아서 약800여명의 병력을 모았다. 부대 단위가 연대인데 800여명 밖에 안남았다.

하지만 이 사행창고 자체가 매우 견고하게 지어졌고 영-미조계지와는 정말 돌던지면 닿을 거리라서 일본군도 중화기를 동원한 공격은 하지 않았다.(아직은 영국-미국이 무서움, 더군다나 영국은 자기들에게 피해가 생기면 가만히 안있겠다고 협박도 했음)

이제 여기서 국민당군을 지휘하던 셰진위안 (谢晋元)은 죽을거라는 예상을 하면서도 버티면서 일본군을 막아낸다.

당시 국민당군 88사단은 장제스가 온갖 노력을 기울여서 키우던 정예사단으로 전원이 독일제 무기와 제식으로 무장된 상태였고 독일군의 전술을 바탕으로 훈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병사기준으로는 아시아 최강의 부대라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사람빼고는 장비가 없었다. 기껏해야 기관총정도뿐. 반면에 일본군은 각종 중화기와 화학무기(독가스)까지 사용했다.

 

오른쪽 사진에서 보면 가운데 작은 강이 있는데 강의 왼쪽의 코카콜라가 그려진 건물이 사행창고이고 오른쪽이 영-미 조계지이다.

 

저 강을 사이로 밤마다 지옥과 천국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행창고는 일본군의 공격을 맞아 죽어가는 병사들이 있는데 영-미 조계지쪽은 매일 파티와 전쟁 관람이 이루어졌다.

물론 조계지쪽의 중국인들도 강건너 중국군을 도와야 한다고 시위도 하고 별짓다했다.

(이 전투를 취재하기 위해 전세계 특파원들이 많이 와 있었다.)

 

거기다가 88사단이 잘 버티고 있자 상부에서는 이걸 정치적 선전전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즉,,, 좀 더 버텨라

전투 중간에 조계지에 피난가 있던 중국인 소녀 양후이민 (楊惠敏)이 당시 중국의 국기였던 청천백일만지홍기(青天白日满地红旗)를 품고는 강을 헤엄쳐가서 연대장에게 전달했다. 무려 폭이 4m짜리 국기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걸스카우트 단원이었다.

연대장은 이걸 사행창고 옥상에 게양을 했다. 당시 상하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은 중국국기였다.

중국 대륙 제작의 영화에 대만의 국기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이제 원래의 목적인 후퇴하는 중국군의 엄호를 위한 시간은 충분히 지나고 88사단 자체도 퇴각을 해야하는데 독이 오른 일본군이 곱게 보내줄리가 없다. 전멸을 시키겠다고 악에 받혀서 포위 공격을 했다.

그래도 전세계 언론에 보도되어 욕을 먹은 일본정부는 한발 물러서서 사행창고의 중국군이 영국 조계지를 통해 철수하는데 합의 했다. 단, 영국 조계지로 들어온 사람에 한해서

이 말은 조계지로 들어가기 전에는 얼마든지 공격해도 된다는 말이다.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조계지와 사행창고 사이에는 작은 강이 있고 다리도 하나 있다.

일본군은 이 다리를 목표로 엄청난 수의 저격병을 배치해서 단 한명도 못넘어가게 하겠다는 자세였다.

하지만 그래도 많은 수의 병력이 조계지로 넘어갔다. 그래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나 싶었지만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조계지로 넘어온 중국군을 무장해제해서는 감금해버렸다. 일본의 강력한 항의때문이었다.(이때 일본이 살짝 꼭지가 돌기 시작했다. 중국군을 놔주면 조계지를 공격하겠다고 했다)

이들은 감금되어 있다가 일본이 영국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다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영국군이 상하이에서 철수하면서 풀어주지 않고 그냥 놔두고 가서이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두고볼수 없는 원수들이다. 감히 일본군에게 최초의 무승부를 기록하게 만들었으니까

(저 사행창고 전투 이전까지는 일본군은 무적이었다. 그런데 그걸 이기지는 못했지만 중국군이 저지를 한것이다.)

연대장이었던 셰진위안은 옷갖 고문을 받았다. 일본군이 아니라 당시에 중국의 일본괴뢰 정권인 왕징웨이 정권에게서 받았다. 아마도 이 사람에게 당했을듯 하다.

바로 영화 색계에서 양조위가 연기했던 왕징웨이 정보책임자인 이모청(易默成)이다.

하지만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였다가 암살당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부대원들은 2중3중으로 고통을 받았다.

일본군 점령시기에는 징용되어서 남양군도까지 가서 강제 노역을 했고, 2차대전이 끝나고는 다시 국민당군에 속해서 공산당군과 싸웠고 공산화 이후에는 장제스의 친위부대였다는 이유로 갖은 박해를 받았다.

물론 대만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영웅대접을 받았지만.

이후에 중국 정부에서도 일본과 싸운 당시 국민당군의 활약을 인정하고 오히려 영웅화를 한다.

그 결과가 오늘 소개하는 사행창고이다.

사행창고는 원형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심지어는 당시에 있었던 총알과 포탄 자국도 그대로이다.

또 들어가보면 당시의 상황을 마네킹을 이용해서 재현을 해놓았는데 마네킹이 사람처럼 생긴 마네킹이 아니라서 오히려 비장감이 느껴진다.

여기가 들어가는 입구이다. 참고로 입장료는 없고 학생들이 굉장히 많이 견학을 온다.

입구로 들어가면 바로 나오는 편지 조각상.

바로 88사단의 명령서이다. 사행창고를 지키라는 내용

당시에 중국군이 사용하던 철모, 대검, 배지와 당시 사진 및 중국군의 편제이다.

잘보면 총사령관에 장제스의 이름이 있다.

당시 사행창고의 미니어쳐. 잘 만들어져 있다.

당시 중국군이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이다. 

결사항쟁을 다짐하는 편지. 일종의 유서이다.

당시 중국군이 가진 중화기라고는 오로지 수류탄뿐이었다. 그래서 창고 바깥쪽에서 올라오는 일본군을 향해서 몸에 수류탄을 감고 뛰어 내리기까지 했다.

위에서 말했던 걸스카우트 대원인 양후이민 (楊惠敏)이 중국국기를 전달하는 장면이다.

참고로 저 소녀는 대만으로 건너가서 평범하게 살다가 대만영화 <팔백장사>가 개봉되고 사행창고 전투가 알려진 이후에야 언론에 나섰다.

당시에 중국군의 이름들과 중국내 각종 신문에 보도되던 사행창고의 기사로 중국은 이때 처음으로 일본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위의 사진은 사행창고 정면으로 보다시피 엄청난 탄흔이 가득하다.

이상으로 사행창고에 대해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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